• 최종편집 2024-04-08(월)
 



법정기념일인 ‘장애인의 날’은 4월 20일이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제40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이 7월 24일에 연기되어 치러졌다. 감염 예방을 위해 여러 장애인단체가 함께 모이는 기념식 대신, 유공자 포상 전수식 행사로 축소되어 진행된 이번행사에서 ‘올해의 장애인 상’을 수상한 이재영 팀장을 만나보았다. 그는 해운대구청에서 6급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_박정호 기자


Q. ‘올해의 장애인상’ 3명의 수상자 중 한 분이십니다. 수상소감을 한마디 해주신다면.

다른 훌륭한 장애인분들도 많은데 큰 상을 받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기도 영광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를 통해 많은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고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제 곁에서 늘 함께해준 아내와 돌아가신 어머니와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Q. 학창 시절을 떠올려본다면

생후 백일까지는 우량아 였다고 해요(웃음). 제가 백일 때 찍은 사진은 있는데 돌 사진이 없습니다. 병이 나 경기가 나서 뇌를 다쳤기 때문이래요. 병원에도 많이 다녀봤지요. 여섯살쯤 의사 선생님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10개 세포 중 3개는 죽어있는데 남은 7개를 이용해 3개를 살리는 방법을 사용하자”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니가 일반학교, 특수학교 어디로 보낼지 고심을 많이 하셨는데 결국 일반학교에 가게 되었고 그 속에서도 뒤쳐지지 않고 생활해 왔지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어요. 전교 1등 할 때도 있었죠. 중학교 때는 전교 4등까지 좀 떨어졌고 고등학교는 반에서 10등 안팎이었어요(웃음).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불합격한다 할 때 저는 6시간 잘 수 밖에 없었어요. 필기를 못하는 저를 위해 제가 친구들 것을 빌려오면 어머니가 필기를 베껴주셨어요. 보통 애들이랑 동등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더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때 실패를 한번 겪었어요. 대학교 예비고사는 붙고 본고사는 떨어졌지요. 결국 학력고사를 쳐서 부산대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대학교는 논문식으로 되어있어서 시험을 칠 수가 없었어요. 조금 불공평하다고 느꼈지만 불평만 하고 있을 순 없었지요. 노력 끝에 결국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Q. 2009년 3월, 6급 공무원 승진 당시 심정이 남달랐을 듯 한데요.

제 인생에서 진급을 처음 했습니다. 처음엔 별정 7급으로 들어왔는데요. 97년도에 IMF가 터지면서 사회복지 분야 쪽에 일꾼이 필요했는지 별정직 공무원들이 일반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살아가며 어머니께서 우시는 것을 딱 두 번 봤습니다. 대학에 도전할 당시 옹벽에 합격자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았을 때 처음 우셨고, 6급으로 진급하는 날 우셨습니다. 그렇게 뭉클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웃음).

처음 생활보고 조사를 하는데 3미터쯤 되는 거리를 걷질 못해 네발로 기어서 조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모습을 보기가 불편했는지 다들 핀잔을 주고 했지만 딱 2년을 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다들 믿어주시더군요(웃음). 동에서 15년 근무하다가 지금 여기 분청에 왔는데 한번 일반 공무원과 경쟁을 시켜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있어 구청으로 보직을 옮기게 되었고 그후 5년 여의 각고 끝에 팀장이 되었습니다.
2006년도 7월, 이제는 허물없이 형님동생하고 지내는 분들이지만 처음엔 당시 계장님, 국장님께서도 제게 일을 맡기면서 조금은 불안하고 못미더워하시더군요. 그러다 홍천에 세미나가 있어서 국장님한테 결재를 부탁드리고 2박 3일 세미나를 다녀왔는데 결재가 안되어 있는거에요.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국장님이 제가 오면 직접 들어보고 결재해줄 생각이셨답니다. 눈물이 팍 나더군요. 저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말이죠. 주변의 신뢰와 응원에 힘입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첫 시행 당시 담당자를 도맡으며 노인장기요양직원, 노인요양기관을 만들 때 4개 시설에 관여해서 예산을 따고 교부하고 했습니다.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에 더 잘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조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저는 사회복지 대상이 되는 사람이자 일꾼이기 때문에 한쪽만 보지 않고 양쪽 측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60년을 살아오며, 그 중 35년 동안 장애인 복지에서 겪은 경험에 의하면 장애인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연의 능력이 80 정도라면 스스로는 90~100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일반인은 50 정도로 낮춰서 봅니다. 그런 출발점이라던가 능력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Q. 안타까웠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씁쓸하게도 좀 어두운 내용의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반송 2동에 근무할 때에요. 요즘도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30% 정도는 그냥 지나갑니다. 당시에도 어렵게 택시를 잡았더니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집에나 있지 뭐한다고 나오냐”고 하더군요. 또 하루는 샌드위치 가게에 갔는데 주인이 대뜸 “비싼데요. 비쌉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불편한 모습만 보고 돈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Q. 감사한 분들이 계신다면.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께서 정말 많이 챙겨주셨어요.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요. 고 2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못가겠다 했는데 선생님께서 “야, 가자”하며 끝까지 챙겨 데려가셨습니다. 또 어머니께서 제가 진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할 때 “저 녀석은 뭘 하든지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용기를 주셨지요. 그 은혜로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판단해주는 전문가가 있다면 더할 나위없겠지요. 당신 능력은 이 정도 입니다. 이 정도는 해봐라! 채찍질하는 전문가 그룹이 있어야 해요. 어떤 일이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든 해놓고 내 몫을 달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장애를 극복했다는 건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제가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참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잘 살아왔지 않나 싶습니다. 감사하게도 3년 전, 20년 교제한 아내랑 결혼도 했지요. 일반인과 근접하게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수를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99점. 1점은 빼놨다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보태볼까 생각 중입니다(웃음). [1099]

주간인물(weeklypeople)-박정호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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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장애인의 날 기념, ‘올해의 장애인상’ 대통령상 수상!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아우르는 복지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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