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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식 청년 재벌, 사회에 '사랑의 회장'을 전하다
    19세에 주식투자를 시작하여 100억 대의 자산가가 된 젊은 청년 재벌. 이 타이틀 하나만으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세상은 그런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개인 투자자들은 투자비법을 배우고자 그에게 환호했고, 예능 프로와 각종 매체들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를 부르는 곳,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기꺼이 동참했고, 어느새 그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주식 재벌 복재성 대표의 럭셔리한 자택, 억대를 호가하는 고급 수입차는 연일 화제였다. 대중이 그의 화려한 이력에 주목할 때, 주간인물은 젊은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거머쥔 주식투자자라는 타이틀 이면의 ‘인간 복재성’이 궁금했다. _박정연 팀장 주식 청년 재벌, 사회에 ‘사랑의 희망’을 전하다 19세 소년 복재성 유학경비 충당 위해 300만원으로 시작한 주식 투자 “학창시절 일본어 특기생으로 대학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정되어있던 특기자 목록에서 제 이름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배후 사정을 알게 되었고, 어린 나이었지만 사회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을 떠나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었기에 유학을 가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복재성 대표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틈틈이 모아온 전재산 300만원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4년 유학경비에 소요될 학비와 생활비를 계산해보았습니다. 대략 2억 4천만원 정도의 경비가 필요했고, 당시의 제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방책은 부동산과 주식이었습니다. 부동산보다는 주식이 제가 가진 300만원으로 현실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렇게 주식투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을 향한 거창한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번 시작한 것, 제대로 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을 뿐이었다. 복재성 대표가 주식을 시작했던 당시는 주식투자에 대한 인식 자체도 부족했고, 주식을 한다고 하면 ‘집안 기둥을 뽑아먹을 녀석’이라는 둥 핀잔을 받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재성 대표는 본인의 확고한 소신을 바탕으로 주식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에서 주식투자 관련 서적을 전부 사들였고, 한권 한권 정복해나갔다. 그렇게 2개월 여. 이론을 마치고, 실전으로 돌입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수중의 300만원을 전부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로써 첫번째 난관에 부딪힌 복재성 대표. 여기서 포기하느냐, 다시금 도전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치열함’으로 이뤄낸 인고와 숙성의 시간 복재성 대표의 선택은 ‘여기서 무너져 내릴 순 없다’였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보란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직권남용 부당처우를 했던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유학자금이 필요했다. “딱 2년만 주식에 미쳐보자. 딱 2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이를 악물고 나의 모든 열정을 몽땅 쏟아내어 보자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깜깜한 터널 끝에 한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다. 해답은 찾았지만, 문제는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 복재성 대표는 낮에는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저녁에는 pc방에서, 주말에는 호프집에서 밤낮, 주일주말 가릴 것 없이 2개월 간 일에 몰두했고, 그렇게 다시 300만원을 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실을 단단하게 다졌던,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하면 안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00만원을 잃었던 당시는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에 단련되어 현재의 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제 자신이 이뤄낸 것이기에 누구든지 목표에 상응하는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재성 대표의 현재 대단해 보이는 화려한 삶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이러한 인고의, 숙성의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복재성 대표는 담담히 읊조렸다. 개인투자자들을 돕고자 힘써왔던 지난날 복재성 대표는 숙성기간을 거치며 주식투자자로서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주변에서 주식 투자에 실패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았다.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던 시절이 떠올라 안타까웠던 복재성 대표는 온라인 주식카페를 개설하여 개인투자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큰 사명감을 가졌었습니다. 그 당시는 주식투자 10번 중 9번을 실패해도 1번을 성공한다면 서민들이 단기간에 큰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도 많은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그것이 제 열정의 원동력이기도 했고요. 반면 현재는 개인투자자를 돕는다는 미명하에 제도를 수정하여 개인이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막혀버렸습니다. 이제 프로낚시꾼들만 물고기를 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닫았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이 돈을 벌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제 유명세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주식 강의. 그를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반대급부로 블랙컨슈머와 악성네티즌 또한 생겨났다. 하지만 한층 단단해진 복재성 대표는 더 이상 세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소신대로 나눔 활동을 펼쳐오고 있을 뿐이다. 기꺼이 따뜻한 손길 내미는, 기부 릴레이 대한민국을 희망하며 “10대라는 나이가 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재성 대표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 생각을 이야기 하자 복재성 대표는 말을 이었다. “10대는 未成年,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나이입니다.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이 대통령도 꿈꿔보고, 국회의원도 꿈꿔보며, 다양한 꿈을 꾸는 시기입니다. 20대는 그 꿈들을 하나씩 실천해보는 나이이고, 30대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꿈을 잡아 키워가는 나이이며, 40대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확고히 해나가는 나이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10대 아이들이 과연 어떤 꿈을 꾸는지 말입니다.” 복재성 대표가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나눔 활동을 시작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모교인 군산 중앙고 후배들 중 재능을 갖추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마음껏 꿈을 꾸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졌기에, 돈걱정 없이 마음껏 꿈을 펼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신이 받았던 것과 같이 사회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훈훈한 대한민국이 되길 희망하며. 이 밖에도 복재성 대표는 장애인 단체 후원 등 다방면으로 기부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복재성 대표는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누구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꿈꿉니다. 다만 성공한 사람이 드문 이유는, 성공을 꿈꾸지만 그에 합당한 노력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안주보다는 도전을 선택하세요.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하세요. 모두가 주식투자에 대한 편견으로 만류할 때, 저는 주식투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겁내지 마세요. 사회가 불안정하다 보니 안정을 추구하는 젊은 친구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20-30대 분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전력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날의 도전은 결과가 어떻든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모두 2017 정유년 뜻한 바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006]
    • 경제
    2017-02-01
  • 완벽주의 ‘채언니’ + 천재 MD ‘갓핸드’ = 코페르,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한 그 치열한 공생관계 속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은 피부와 직결되어 있다. 고가의 성형시술을 받고 예쁜 옷을 걸친들, 본연의 피부가 좋지 않으면 꾸며진 아름다움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의 ‘피부’에 대한 고민은 한결같다. 여기에 ‘코페르’는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All in One 제품으로 간편함은 물론 피부재생에 도움을 주는 병풀추출물을 67.8%나 아낌없이 듬뿍 넣어 제조 성분에 차별화를 가했다. 뛰어난 제품력에 소비자 참여형 SNS마케팅까지 더했더니 전제품 매진을 기록하며 국내 화장품 업계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코페르.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한 열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채언니’ 채윤석 대표와, ‘갓핸드’ 허운회 대표의 기분 좋은 아웅다웅 공생관계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_박정연 ­­팀장 제조유통 ‘Best Innovation’과 연구개발 ‘ES Biotech’의 합작으로 탄생한 코페르(Kopher), 그 힘찬 서막을 열다 2016년 8월 22일. 정직하게 ‘성분’으로 승부하는 ‘코페르’ 화장품이 런칭됐다. 좋은 제품은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본다고, 코페르는 런칭과 동시에 SNS상에서 핫한 화장품으로 입소문을 타며 1,2,3,4차 생산품 전량 매진의 쾌거를 안았다. Best Innovation과 ES바이오텍이 합작하여 레시피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제작 유통한지 2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과이다. Best Innovation은 뷰티 에스테틱을 전문으로 하는 유통 회사로 ES바이오텍에서 연구개발한 코페르의 한국총판권을 갖고 코페르 제조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화장품 브랜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코페르가 이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채윤석 대표는 3가지를 말한다. 첫째 아낌없이 쏟아넣은 좋은 성분, 둘째 SNS를 활용한 소비자 참여 마케팅, 마지막으로 완벽한 화장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채윤석 대표와 허운회 대표의 양보 없는 치열한 열정까지.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루었기에 코페르가 탄생했고,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피부재생에 도움을 주는 병풀추출물 67.8% 함유 정직한 화장품 ‘코페르(Kopher)’의 탄생 기존 화장품의 성분을 살펴보면 정제수, 즉 정제된 ‘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부를 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화장품 성분의 절반 이상이 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제수를 기본 베이스로 하여 피부에 좋은 성분을 소량 첨가하는 것이 기존 화장품의 제조 방식이었다면, 코페르는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방식을 뒤집었다. 상처재생에 뛰어난 효과를 지닌 병풀추출물을 67.8%로 함량을 대폭 늘려 기본베이스로 하고, 그 다음에 정제수를 첨가한 것이다. 이러한 제조방식의 작은 변화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낌없이 투여한 정직한 성분은 소비자의 피부에서 정직하게 효과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서브브랜드인 ‘라라봉’의 마스크팩 역시 병풀추출물이 53.4% 함유되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바싹 마르는 일반 마스크팩과는 달리 ‘고농축 수분폭발 마스크팩’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허운회 대표는 병풀추출물과 All in One 화장품의 원조인 인물로, 코페르와 라라봉의 기분좋은 성공으로 이를 비슷하게 따라 만든 제품들이 하나둘 시장에 나오는 것에 대해 '우리 제품이 그만큼 좋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후발주자들이 따라만들고 싶은 제품들을 계속적으로 개발하겠다'고 말한다. 소비자와 함께 만들어 가는 코페르 사회적 기업으로의 발돋움 채윤석 대표는 ‘채언니’로 허운회 대표는 ‘갓핸드’로 SNS상에서 불리운다. 이는 소비자들이 지어준 애칭으로, 코페르와 소비자간의 거리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Best Innovation에서 코페르의 제작·유통을 담당하며, 채윤석 대표는 별도의 제품 홍보 없이 화장품 샘플만으로 SNS마케팅을 시작했다. 소비자들과의 소통창구로 카카오스토리를 개설하여 24시간 밤낮없이 소비자의 의견을 들었다. 점차 제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후에는 보다 소비자들과 가까이 만나고자 지역간담회를 주최했다. 소비자들의 생생한 후기를 듣고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요청사항을 수렴했다. 제품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사용해보면 코페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채윤석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코페르 세럼은 물론 비누까지 전제품 매진을 기록하며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소비자들의 사랑으로 클 수 있었다’며 겸손하게 말하는 채윤석 대표. 그는 소비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사회로 환원하고자, 보이지 않는 작은 노력들을 지속해오고 있다. 지역사회의 소외계층들에게 필요물품 기부는 물론, 아산시와 협력하여 자선 바자회 개최 등 대한민국 사회에 기부문화의 확산을 촉진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코페르를 ‘낳은’ 허운회 대표, 코페르를 ‘키운’ 채윤석 대표 건강한 피부를 위한 끝없는 열정의 아웅다웅 코페르 세럼의 성공으로 다음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All in One 클렌징인 ‘코페르 비누’가 탄생했다. 코페르 세럼 사용 후 코페르 제품에 대한 완벽 신뢰를 갖게 된 소비자들은 코페르 비누 또한 애정해 마지않았다. 비누를 출시한지 한달도 채 되지않아 전체 완판의 기쁨을 안은 것이다. 소비자들이 이토록 코페르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두 대표의 한치의 양보없는 열정이 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두 대표는 코페르 비누에 얽힌 에피소드를 꺼내놓았다. 허운회 대표가 1차로 비누를 개발하여 채윤석 대표에게 샘플비누를 건넸다. 채윤석 대표는 직원들과 꼼꼼하게 피부, 헤어 클렌징을 해본 후 제안사항을 허운회 대표에게 요청했다. 직원 9명에게 합격점을 얻었지만, 1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면, 비누는 다시금 연구개발 단계로 들어간다. 허운회 대표는 ‘10명 모두에게 적합할 수는 없다. 나를 믿으라’고 이야기하면, 채윤석 대표는 ‘완벽한 제품을 위해 10명 모두에게 합격점을 얻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2차 비누가 왔고 3, 4차 비누가 왔다. 총 7번의 업그레이드 끝에 명품 비누인 ‘코페르 비누’가 탄생했다. 코페르의 화장품은 ‘세럼’과 ‘비누’ 이 2가지가 전 제품으로, 제품가짓수를 늘리기보다는 한가지를 제대로 만들어 양질의 제품을 만들자는 두 대표의 철학이 맞닿은 지점이다. 하나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선보이기까지, 완벽한 제품을 선보이려는 끊임없는 의견다툼으로 매일같이 아웅다웅 옥신각신한다는 두 대표. 비누를 제작 개발하는데 무려 7번의 개발단계를 거치며 다투고 화해하며 마신 술값만 해도 꽤 많을 것이라며 마주보며 웃는 두 대표를 보니 기자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그들의 완벽을 향한 열정이 값지다. "좋은 원료를 찾기위해 다양한 재료를 즙도 내보고, 발효도 하며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코페르의 차기작으로 선보이고자 저희가 주목한 원료는 000입니다. 물론 000은 일급비밀입니다.(웃음)" 두 대표와의 인터뷰, 웃음이 끊이질 않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주간인물은 채언니와 갓핸드의 흥미로운 공생관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여성들의 피부 아름다움을 책임져주길 기대한다. [1005]
    • 경제
    2017-01-13
  • 무역 경력 40여년 FTA 23년, 독보적인 FTA의 실무 전문가 “세계는 현재 FTA 네트워크 전쟁 중입니다”
    FTA는 국가 간 맺는 특혜 무역협정의 하나로 관세의 인하·철폐, 서비스 개방, 무역제재 수단의 최소화, 시장 통합 등 국제시장에서 자유무역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한다. FTA 협정으로 양국의 경제가 효율적으로 성장하기에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FTA별, 국가별 규범을 알지 못하면 크나큰 손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40여 년 간 무역 실무 경험을 쌓아온 이창우 회장은, 무역 현장에서 FTA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FTA에 대한 연구와 강의, 컨설팅, 수출촉진 활동을 꾸준히 해온 FTA의 독보적인 실무 전문가 1호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FTA산업협회(KFIA)를 설립하여 국제 통상 분야에서 국가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이창우 회장. 그를 만나 FTA의 중요성과 메가 FTA로의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박정연 ­­팀장 “FTA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국내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규모는 실로 대단하다. GDP(국내총생산) 90% 이상, GNI(국민총소득) 100% 이상으로, 체감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곡물의 70% 이상을 수입하고 있으며 약 97% 에너지와 98%의 자원 또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창우 회장은 우리나라는 무역의존도가 특히 높은 국가이기에, 국가 경제가 걸린 중대한 문제인 FTA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언급했다. FTA는 점점 더 방대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올 6월까지 발효된 FTA는 424개로, 협상이 진행 중인 것까지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약 700개가 넘을 것이라고 이창우 회장은 말한다. FTA는 이미 세계 무역의 절반을 넘어섰고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기존의 무역은 WTO 등에서 정한 ‘무역 표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따르면 됐다. 반면 FTA는 협정별로 규범이 전부 다르고, FTA 교역 프로세스 또한 다르기 때문에 같은 품목이라도 FTA에 따라 거래 프로세스가 달라 상당히 복잡하다. 이로 인해 국내 기업이 FTA 협약을 맺은 국가로 수출을 하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례로, 한 국내기업이 라면 13톤을 터키에 수출하려다 무역절차 중 ‘진입규범’에 문제가 생겨 전량 폐기, 막대한 손실을 떠안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무역 절차 중 ‘원산지 증명’에만 신경 쓴 나머지 앞선 절차인 ‘진입규범’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업의 손실은 결국 국가적 손실이다. 이러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이창우 회장은 실무경험과 끊임없는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6개 정부부처와 35개의 대학, 9개 공무원 연수원, 지자체, 경제단체, 로펌, 국내 대기업 등에서 FTA 강의를 해왔다. 그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욱 유명세를 띤다. 인도, 중국, 헝가리, 독일, 일본, 베트남 등 각국에서 그에게 FTA 협조를 요청했고, 특히 중국은 FTA 전문가인 그를 영입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독일, 헝가리, 중국기업들에게 FTA 강의를 했으며 중국기업들에게는 현재도 FTA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외로 진출하지 않고, KFIA를 설립하여 국내에서 활동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FTA를 하려면 4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국익을 창출해야 기업이 살고 국민의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둘째, 시장경쟁력의 강화입니다. 세계는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제통상 시장의 트렌드에 맞춰 국내 시장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셋째 미래먹거리 창출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에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먹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넷째 일자리 창출입니다. FTA는 일자리 창출의 보고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국에서 저를 초빙하려는 이유가 FTA를 활용하여 수출을 증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일자리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FTA 특성에 부합하는 수백 개의 FTA 콘텐츠와 아이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에는 없는 FTA 지식재산이기 때문에, 제가 중국 등 해외로 나가면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지만 우리 기업들은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 저의 지식과 경험, 콘텐츠를 활용하고 싶지, 아무리 큰돈을 번다하더라도 해외에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대사나 공사, 국장급들이 저를 찾아오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관심이 없어서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창우 회장은 국제적으로 FTA 활용분야의 독보적 존재이기에, 그가 해외로 나간다면 기술유출을 넘어 지식재산 유출이 발생함으로써 더욱 광범위하고 막대한 국가적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TPP, RCEP 등 메가 FTA에 대비해야 합니다” ‘메가 FTA는 두 나라 간 협정인 양자 FTA와 달리,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 간 FTA’ 중에서 매우 큰 다자 FTA를 뜻한다. 한·중·일 FTA, 아시아 태평양 경제통합 FTA(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이 이에 포함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시장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TPP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이창우 회장은 강조한다. 예를 들면 “TPP에 가입하지 않은 채로 TPP 국가로 수출하고자 하면 12나라로 각 12번의 통관절차가 필요합니다. 반면 TPP 가입을 하면 교역 규범이 통일되고, 인 허가와 같은 진입조건이 같아지기에 시장 통합효과를 냅니다. 물류부터 구매, 마케팅, 생산 등 나라별로 수출 설계를 해야 했던 것이, 12나라를 한 시장으로 간주함으로써 교역비용과 시간, 노력 등이 1/12로 절감이 가능한 것이지요. 물론 국가별 예외는 있습니다만 수출의 편리성 제고는 물론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미국 트럼프 신 행정부가 TPP를 탈퇴한다고 주장했으니 결과를 두고 봐야 합니다.” FTA 체결도 중요하지만, 체결한 FTA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창우 회장은 ▲FTA 체결국과는 FTA를 통해 거래할 것 ▲FTA 협정문을 준수할 것 ▲FTA 체결국의 현장 팩트를 반영할 것 ▲FTA 진화를 따라갈 것을 강조했다. 이창우 회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메가 FTA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民官學이 협력하여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야 함을 역설했다. ‘FTA는 일자리 창출의 황금 시장’임을 이야기하며 언제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콘텐츠, 아이템, 노하우, 비즈니스 모델들을 정부, 지자체, 기업체 등과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주간인물은 이창우 회장이 FTA 전도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걸어온 지난날의 노고에 존경을 표하며, 그가 있어 국제 통상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를. 그리하여 국가 경제가 생명력을 얻어 보다 활기찬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대한다. <現 국내 Profile> 現 한국FTA 산업협회 회장 現 World FTA Forum 회장 現 한국통상정보학회 부회장 現 한국서비스산업총연합회 FTA 전략위원장 現 고려대, 중앙대, 세종대, 경기대 등 35개 대학 FTA 외래교수 現 9개 공무원연수원 FTA 외래강사 <외국 FTA 경력사항> 주한중국상공회의소 및 주한중국상무부투자촉진국 임직원 FTA 강의 헝가리 국무총리 방한 수행 기업 FTA 강의 독일 강소기업 방한단 FTA 강의 주한 인도대사 FTA 활용 협의 주한 태국공사 FTA 활용 협의 일본 경제산업성 국장급 대표단 FTA 협조 협의 중국 상무부 요청으로 중국내 기업 및 공무원 FTA 강의 주한 러시아 연방정부 무역대표부와 공동으로 민간 측면에서 한-EAEU FTA 추진 협의 인도네시아 정부 청년 일자리 창출 사업 참여 코스타리카 대통령 방한단 FTA 협조 협의 중국, 러시아, 태국 등과 FTA 교재 출판(FTANOMICS: 이창우 저) 추진 외 다수 [1004]
    • 경제
    2017-01-06

문화 검색결과

  • 함께 해 온 세월, 깊은 사연이 담긴 가구 “가구 수리는 추억의 재현입니다”
    뚝딱뚝딱. 스윽스윽. 정겨운 작업소리를 들으며 양호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문을 관통하여 작업실에 내리쬐는 12월의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는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마주한 오양호 장인. 안경 너머 보이는 반달눈, 사람 좋은 웃음이 서린 입가. 흡사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가 연상되는 푸근한 인상이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말썽꾸러기 목각 인형 ‘피노키오’를 사랑으로 포용해주었듯, 오양호 장인은 섬세한 손길로 오래되어 낡고 망가진 ‘가구’들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는 ‘가구는 추억’이라고 말한다. 조립식 가구를 떠올리는 기자와 오양호 장인이 생각하는 가구의 의미,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닐까. 오양호 장인이 말하는 ‘가구’를 들어보았다. _박정연 ­­팀장 ‘추억’을 선사하는 행복한 가구수리 전문점 오양호 장인을 찾는 고객들은 전부 입소문을 타고 소개로 그를 찾는다. 서울은 물론 경기, 제주 등 각지에서 새로운 탄생을 고대하는 고가구와 골동품 등이 그에게 날아든다. 다른 가구수리업체에 한번 맡겨졌던 가구가 오양호 장인에게 다시 오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낡고 망가진 가구가 100% 복원되기 때문에. 처음 가구를 들였던 그때의 모습을 되찾아주어, 처음 가구를 들이던 그날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초창기에 아주 오래된 자개장 복원을 의뢰 받았습니다. 거의 폐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오래되고 낡은 자개장이었기에 ‘너무 낡았으니 버리고 새로 하나 구입하십시오’라고 말했더니 어르신께서 저를 야단치셨습니다. ‘내가 이 자개장을 결혼할 때 혼수로 해와서 50-60 평생을 함께 해왔다. 집안도 한평생 화목했고, 자식들도 잘되어 품을 떠났다. 이렇게 福장인데 버리라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복원을 해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소개도 많이 해주시고 칭찬일색이셨습니다. 그럴 때 참 기쁘고,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고객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겨있는 가구는 ‘추억의 매개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오양호 장인은 자개장 이후 하나하나의 가구 의뢰건에 대해 더욱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여 현재 가구수리 분야에서 알아주는 오양호 장인을 이루었다. 100% 완벽하게 가구 복원 철저한 ‘장인정신’의 실현 가구 수리는 보통 자개장, 락카, 티크, 골동품 등 전문 기술 분야가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가구 수리 장인은 1~2가지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오양호 장인은 가구 수리에 관한 한 전범위를 아우른다. 어떤 가구라도 양호방에 오면 100% 완벽하게 복원 가능하다. “벌써 몇 십 년 전 일입니다만…. 부모님께서 사용하시던 고가구 몇 점이 있었습니다. 가구수리 견습생 시절, 배우는 단계이다 보니 실습을 하다 잠깐의 실수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그 때 보낸 가구에 대한 안타까움이 섞여 아쉬움만 점점 커져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구라도, 아무리 진귀한 골동품이라도 제게는 그때 그 가구만큼 소중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사용하셨던 손때 묻은 고가구를 좀 더 신중하게 다루지 못했던 그때의 실수가 제 평생의 한으로 남습니다.” 오양호 장인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슬쩍 훔쳤다. 그러한 아픈 기억이 있기에, 자신에게 맡겨지는 가구들에 더욱 완벽을 가해 복원하는 것이 아닐까. 오양호 장인은 40년간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고객들의 가구수리[추억의 재현]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후임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구 수리 기술은 빠르게 습득되지 않습니다. 가구마다 사례가 다양하기에 몇 년간의 견습 시기를 견뎌야 하는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힘든만큼 보람도 큰 작업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오양호 장인은 말을 덧붙였다. “원목가구 같은 경우, 가정에서 사용하다 보면 나무가 많이 건조됩니다. 그로 인해 의자가 흔들리고, 책상이 터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원목가구들은 재수리를 한번 받으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몰라 좋은 가구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습니다. 여름철엔 습도로 인해 늘어나고, 겨울이 되면 줄어드는 것이 원목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함께 해온 고가구 버리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해드리겠습니다.” [1004]
    • 문화
    2017-01-06

라이프 검색결과

  • 성공한 사업가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대부[代父]
    윤용병 대표가 29세이던 시절.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그에게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10식구를 책임지며 어렵사리 사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기에, 윤용병 대표는 돈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가엽게 느껴졌다. 문득 ‘여기저기 돈을 빌리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윤용병 대표는 돈을 마련하여 소녀에게 빌려주었다. 차후 알고 보니 그 소녀는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윤용병 대표를 찾아온 것이었다. 소녀와의 인연으로 소년원 출소 아이들이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여 다시금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용병 대표. ‘소녀를 도운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먹먹해진다’고 말하는 그는 34년 째 보호지원에 앞장서고 있으며, 성현회를 설립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든든한 후원자인 윤용병 대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는, 마음 따뜻해지는 그의 스토리로 들어가 본다. _박정연 팀장 <홍콩갱생보호 후원회장단 서울지부 견학,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따사모(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자매결연> 젊은 나이에 기꺼이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으로 윤용병 대표는 넉넉하진 않지만 다정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다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라온 그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부친의 사업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려워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당시 6학년이었던 그는 생업전선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신문배달을 하여 벌은 돈으로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학교 등록금을 모으고, 은행에 적금까지 했다. 알뜰하게, 부지런하게 살아왔지만 그가 20대가 되었을 때 집안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젊은 나이에 10식구의 가장이 된 윤용병 대표. 그는 직장을 마치고 영어 과외를 겸하고, 과외를 마친 뒤에는 공단오거리 옆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윤용병 대표의 하루 마감시간은 새벽 2시였다. 그렇게 매일을 근면성실하게 살아왔다. 30대에 들어서는 선배에게 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활기를 띠었고, 사업 7년 차가 되자 집안의 빚을 어느 정도 탕감할 수 있었다. 이후 낳아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기쁨으로 살아왔다는 윤용병 대표. “지금도 항상 믿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신이든, 주위 사람들이든 말입니다.” 선함과 이타심, 공경심과 효심으로 출소자와 어르신들을 따뜻하게 품에 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법 없이도 사셨던 선한 분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게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선[善] 지니고, 이타심[利他心]으로 타인을 도우며 살라고 말입니다. 두 분의 가르침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실현하고자 항상 노력해왔습니다.” 소녀와의 인연으로 출소자들에게 관심 갖게 된 윤용병 대표. “출소자들이 형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을 때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다시금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출소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과 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법무부 산하 한국갱생보호공단(現 법무보호공단)에서 운영하는 소년원 출소자들의 쉼터인 ‘은평출장소’와 ‘방이동 딸부잣집’에 머무르는 아이들에게 진로교육과 더불어 후원활동을 펼쳐왔다. 강연과 상담은 물론, 장학생들을 선발하여 매달 10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 출소자들의 결혼식 등을 진행해왔다. 보호지원활동을 34년째 지속해오며 현재는 전국보호위원연합회의 명예회장과 전국보호위원연합회 서울지부의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출소자와 출소자 가족구성원이 스스로를 귀중하고 존귀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도록, 자긍심을 고양시키도록 돕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또한 사회복지 성현회를 운영하며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봉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의 안타까운 사례를 종종 접했습니다. 한 평생 가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자 시작한 것이 사회복지 성현회입니다.” 사회복지 성현회를 운영하며 어르신들을 돕는 이유로 윤용병 대표는 공경심[恭敬心]과 효심[孝心]을 꼽았다. 분열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사회의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하는 그이다.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전진대회,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따사모(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자매결연> 그가 지닌 책임감으로 신중하게 사업체를 이끌어 갈 터 윤용병 대표는 ‘사업체를 키워오며 큰 실패는 없었다’고 담담하게 고백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윤용병 대표를 마냥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윤용병 대표는 ‘차마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실패하면 아니되었다. 책임감이 무거웠기에, 젊은 날의 꿈을 좇을 수 없었다. 행여 사업상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과 10식구는 물론 그가 돕고 있는 출소자들까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리스크가 큰 사업은 진행할 수 없었다. ‘항상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신중하게 사업체를 운영해왔다’고 윤용병 대표는 이야기했다. “20대, 생업을 떠안게 된 무렵에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자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0여 년 가량 직원들보다 1시간 선출근, 1시간 후퇴근하며 회사 전반의 업무를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일찍이 생업에 뛰어들어 부족하다 생각했던 학업은 독서로 충당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20년 간 일주일에 3권 이상의 책을 탐독했는데, 그 시기 특히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이 틔었습니다. 당시는 국내 경제가 일본보다 30년 가량, 미국보다 50년 가량이 뒤졌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전망하기 위해 30년 전의 일본이 발전해나가는 과정, 50년 전의 미국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각국의 경제서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보다 나은 회사 경영을 위해 공부하고 고민했던 치열한 시간들은 경영자로서 굉장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경영자로서 단단한 내실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주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앞으로도 신중하게 사업체를 이끌어갈 것임을 말했다. 인터뷰 차 만난 윤용병 대표는 그 존재로서 감동을 주는 인물이었다. 외로운 출소자들에겐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희망을, 사회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들에게는 미래를 꿈꾸도록 용기를 심어주었다. 배고픈 어르신들에겐 공경심을 담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그가 일상으로 행하던 베풂이 어떤 이에게는 세상으로부터 처음 받아보는, 혹은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온정 어린 손길이었을 것이다. 숭고한 봉사정신에 뜻을 품고 한 평생을 살아온 윤용병 대표. 그가 있어 출소자들, 어르신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이가 존중받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PROFILE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前 법무부 갱생보호회 서울지부 불교후원회 회장 前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재정지원 후원회 회장 前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불교후원회 회장 前 성우주택 회장 前 성우여행사, 성우유학원 대표 前 서울지방경찰청 여성아동대책자문위원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지부 운영위원장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지부 후원연합회 회장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전국보호위원연합회 회장 現 해동선우회 회장 現 사회복지 성현회 회장 現 삼성글로벌 대표 겸 회장 現 성우물산 대표 겸 회장 現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전국보호위원연합회 명예회장 現 국토부산하 KIB 상임감사 [1008]
    • 라이프
    2017-03-02
  • “웃음을 선물해 드립니다. 행복은 덤입니다”-인간비타민, 이벤트 전문MC 서교철 대표와의 만남
    편리해지는 만큼 잊혀져 가는 것도 많은 세상. 디지털의 발달로 개인화 성향이 짙어지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놀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이들은 손안의 조그맣고 네모난 세상에서 벗어나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통해 얼굴을 마주보고 웃음지으며 몸을 맞닿고 함께 하는 놀이를 경험한다. 팀워크를 도모하면서 자연스레 이해심과 협동심을 습득하게 되며, 인간관계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는 비단 어린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야유회, 워크숍, 송년회를 통해 성인들에게도 해당된다. 더불어 그는 어르신들의 놀이문화를 위해 ‘실버 레크리에이션’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아이부터 청소년, 성인, 어르신까지. 건강하고 즐거운 놀이문화의 확립을 통해 그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소통과 이해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았다. _박정연 팀장 유아동 행사부터 학교행사, 기업행사까지 행사계의 유재석으로 불리는 서교철 대표 놀이사랑 (http://playlove.or.kr),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http;//fctour.kr) ‘놀이사랑’은 서울 YMCA 건전놀이문화연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서교철 대표가 ‘건전한 놀이문화’의 정착을 목적으로 2001년 설립한 이벤트 전문 회사로, 유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성인, 실버 세대까지 전 연령을 아울러 각종 이벤트 행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유아 행사는 재롱잔치(학예발표회) 진행, 유아가족체육대회 △어린이 행사는 방과후수업(레크매직), 어린이방문 공연(노태형실장님과 함께하는 해피아저씨와 멋쟁이마술사, 튼튼아저씨 이석우님과 함께하는 튼튼아저씨와 해피아저씨 등), 웅진플레이도시 산타행사 등 △청소년 행사는 중,고등학교 축제는 물론 롯데월드 학교진로체험 레크리에이션, 웅진플레이도시 청소년힐링콘서트 △대학생 행사는 각종 대학축제, OT 및 MT 레크리에이션 △성인행사는 각종 기업체와 동우회, 동문회 등과 체육대회, 세미나, 송년회 행사 등을 진행한다. 서교철 대표에게 롯데월드와 웅진플레이도시, 리솜스파캐슬 전속 이벤트 MC로서 활동하는 내역에 대해 물었다. “롯데월드는 17년째 행사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단체로 오는 팀들을 가든스테이지에서 장기자랑을 포함하여 단체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웅진플레이도시에서는 겨울철 스노우파크 산타축제 및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위해 투입되었다가 봄,가을 진로체험 진행을 맡게 되었고 여름 워터파크 이벤트행사 진행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진로체험은 배우 김은희님과 함께 청소년들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는 힐링콘서트를 메인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효과가 좋아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리솜스파캐슬은 네잎크로바컴퍼니에서 메인MC와 더불어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상무이사직을 겸하고 있어서, 리솜스파캐슬 전속대행사로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종 행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시시각각 만능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했던 서교철 대표.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밝게 웃으며 ‘오늘은 이벤트 MC, 내일은 마술사, 내일모레는 율동선생님이 된다. 지루할 틈이 없이 매일매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낍니다” 천성이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서교철 대표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이벤트 MC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같이 ‘교철이 네가?’ 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말수도 적었고, 수업시간에 국어책을 읽는 것까지도 부끄러워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학생 시절. 모태신앙인이라 다니던 교회에서 총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마이크로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전부 제게 집중을 했고, 간혹 용기를 내어 웃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하나둘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놀랍기도 했고, 신세계였습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는 것이 굉장히 기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 총무임원시절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 마이크를 잡은 지 어언 23년이 되었네요(웃음).” 더불어 서교철 대표는 말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하다고 합니다. 조금 더 웃고자 노력한다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저의 직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아부터 어르신들까지, 연령을 불문하고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제 일이 정말 좋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23년의 이벤트MC 경력보다도, 자신의 일을 진정 즐길 줄 아는 승자이기에 이벤트MC분야에서 명MC로서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벤트 MC에게는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중요합니다” 이벤트 행사 MC로서 활동해온 23년 목표는 50주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고난 MC였던 것은 아니었다. 행사장에서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행사 진행 중 무대로 취객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땐 당황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저희 고문님이 기분이 좋으셔서 한잔 걸치셨나 봅니다. 고문님! 행사 마치고 봬요!’라고 웃으며 넘어갑니다. 취객 난입으로 많은 분들이 걱정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제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어감으로써 사람들도 함께 웃으며 넘어갑니다. 어느 날은 행사 진행 중, 갑자기 정전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력부족으로 차단기가 내려가서 불도 꺼지고 마이크도 꺼진 상태였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제가 목청이 좋다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내려두고 저의 큰 목소리로 행사를 즐겁게 이어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숱한 돌발상황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훌륭한 대처능력들이 쌓여 현재의 명MC 서교철 대표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행사가 끝나면 항상 현장 스탭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본인이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듣고, 다음 행사에 수정하여 적용함으로써 좀 더 완벽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있어 완벽을 추구하는 서교철 대표, 진정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자주 들었던 말은 ‘감사하다’ 였다. 기자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가. 팍팍한 삶에 치여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감사하다는 생각은 얼마나 잊어버리기 쉽던가.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서교철 대표의 밝은 에너지에 동화되어 있었다. 인간비타민, 웃음과 긍정을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서교철 대표가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서교철 대표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주간인물 독자분들께 인사의 말씀 전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로 즐겁게 일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또한 비수기에도 끊임없이 저를 찾아주시고 행사가 들어오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주간인물 독자분들도 자신의 직업에서 즐거움을 찾고 매일매일 감사하며 항상 웃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이 저물고 2017 정유년입니다. 뜻하는 바 이루시는 2017년 만들어가시길 바라며, 행사진행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세요. 저와 함께하는 행사! 생애 최고의 멋진 날로 만들어드릴게요.” 성균관대학교 과학기술대학원 스포츠산업학과 졸업 놀이사랑 레크리에이션 이벤트 대표 웅진플레이도시 이벤트 MC 롯데월드 이벤트 MC 네잎크로바컴퍼니 메인 MC (주)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상무이사 前 서원대학교 임상건강운동학과 출강 前 을지대학교 레크리에이션 지도과목 출강 前 무대의상 예쁘제, 파티파티, 연출 율동강사 [1004]
    • 라이프
    20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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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한 사업가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대부[代父]
    윤용병 대표가 29세이던 시절.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그에게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10식구를 책임지며 어렵사리 사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기에, 윤용병 대표는 돈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가엽게 느껴졌다. 문득 ‘여기저기 돈을 빌리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윤용병 대표는 돈을 마련하여 소녀에게 빌려주었다. 차후 알고 보니 그 소녀는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윤용병 대표를 찾아온 것이었다. 소녀와의 인연으로 소년원 출소 아이들이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여 다시금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용병 대표. ‘소녀를 도운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먹먹해진다’고 말하는 그는 34년 째 보호지원에 앞장서고 있으며, 성현회를 설립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든든한 후원자인 윤용병 대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는, 마음 따뜻해지는 그의 스토리로 들어가 본다. _박정연 팀장 <홍콩갱생보호 후원회장단 서울지부 견학,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따사모(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자매결연> 젊은 나이에 기꺼이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으로 윤용병 대표는 넉넉하진 않지만 다정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다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라온 그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부친의 사업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려워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당시 6학년이었던 그는 생업전선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신문배달을 하여 벌은 돈으로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학교 등록금을 모으고, 은행에 적금까지 했다. 알뜰하게, 부지런하게 살아왔지만 그가 20대가 되었을 때 집안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젊은 나이에 10식구의 가장이 된 윤용병 대표. 그는 직장을 마치고 영어 과외를 겸하고, 과외를 마친 뒤에는 공단오거리 옆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윤용병 대표의 하루 마감시간은 새벽 2시였다. 그렇게 매일을 근면성실하게 살아왔다. 30대에 들어서는 선배에게 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활기를 띠었고, 사업 7년 차가 되자 집안의 빚을 어느 정도 탕감할 수 있었다. 이후 낳아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기쁨으로 살아왔다는 윤용병 대표. “지금도 항상 믿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신이든, 주위 사람들이든 말입니다.” 선함과 이타심, 공경심과 효심으로 출소자와 어르신들을 따뜻하게 품에 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법 없이도 사셨던 선한 분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게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선[善] 지니고, 이타심[利他心]으로 타인을 도우며 살라고 말입니다. 두 분의 가르침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실현하고자 항상 노력해왔습니다.” 소녀와의 인연으로 출소자들에게 관심 갖게 된 윤용병 대표. “출소자들이 형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을 때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다시금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출소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과 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법무부 산하 한국갱생보호공단(現 법무보호공단)에서 운영하는 소년원 출소자들의 쉼터인 ‘은평출장소’와 ‘방이동 딸부잣집’에 머무르는 아이들에게 진로교육과 더불어 후원활동을 펼쳐왔다. 강연과 상담은 물론, 장학생들을 선발하여 매달 10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 출소자들의 결혼식 등을 진행해왔다. 보호지원활동을 34년째 지속해오며 현재는 전국보호위원연합회의 명예회장과 전국보호위원연합회 서울지부의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출소자와 출소자 가족구성원이 스스로를 귀중하고 존귀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도록, 자긍심을 고양시키도록 돕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또한 사회복지 성현회를 운영하며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봉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의 안타까운 사례를 종종 접했습니다. 한 평생 가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자 시작한 것이 사회복지 성현회입니다.” 사회복지 성현회를 운영하며 어르신들을 돕는 이유로 윤용병 대표는 공경심[恭敬心]과 효심[孝心]을 꼽았다. 분열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사회의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하는 그이다.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전진대회,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따사모(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자매결연> 그가 지닌 책임감으로 신중하게 사업체를 이끌어 갈 터 윤용병 대표는 ‘사업체를 키워오며 큰 실패는 없었다’고 담담하게 고백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윤용병 대표를 마냥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윤용병 대표는 ‘차마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실패하면 아니되었다. 책임감이 무거웠기에, 젊은 날의 꿈을 좇을 수 없었다. 행여 사업상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과 10식구는 물론 그가 돕고 있는 출소자들까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리스크가 큰 사업은 진행할 수 없었다. ‘항상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신중하게 사업체를 운영해왔다’고 윤용병 대표는 이야기했다. “20대, 생업을 떠안게 된 무렵에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자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0여 년 가량 직원들보다 1시간 선출근, 1시간 후퇴근하며 회사 전반의 업무를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일찍이 생업에 뛰어들어 부족하다 생각했던 학업은 독서로 충당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20년 간 일주일에 3권 이상의 책을 탐독했는데, 그 시기 특히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이 틔었습니다. 당시는 국내 경제가 일본보다 30년 가량, 미국보다 50년 가량이 뒤졌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전망하기 위해 30년 전의 일본이 발전해나가는 과정, 50년 전의 미국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각국의 경제서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보다 나은 회사 경영을 위해 공부하고 고민했던 치열한 시간들은 경영자로서 굉장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경영자로서 단단한 내실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윤용병 대표는 주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앞으로도 신중하게 사업체를 이끌어갈 것임을 말했다. 인터뷰 차 만난 윤용병 대표는 그 존재로서 감동을 주는 인물이었다. 외로운 출소자들에겐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희망을, 사회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들에게는 미래를 꿈꾸도록 용기를 심어주었다. 배고픈 어르신들에겐 공경심을 담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그가 일상으로 행하던 베풂이 어떤 이에게는 세상으로부터 처음 받아보는, 혹은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온정 어린 손길이었을 것이다. 숭고한 봉사정신에 뜻을 품고 한 평생을 살아온 윤용병 대표. 그가 있어 출소자들, 어르신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이가 존중받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PROFILE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前 법무부 갱생보호회 서울지부 불교후원회 회장 前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재정지원 후원회 회장 前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 불교후원회 회장 前 성우주택 회장 前 성우여행사, 성우유학원 대표 前 서울지방경찰청 여성아동대책자문위원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지부 운영위원장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지부 후원연합회 회장 前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전국보호위원연합회 회장 現 해동선우회 회장 現 사회복지 성현회 회장 現 삼성글로벌 대표 겸 회장 現 성우물산 대표 겸 회장 現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전국보호위원연합회 명예회장 現 국토부산하 KIB 상임감사 [1008]
    • 라이프
    2017-03-02
  • 주식 청년 재벌, 사회에 '사랑의 회장'을 전하다
    19세에 주식투자를 시작하여 100억 대의 자산가가 된 젊은 청년 재벌. 이 타이틀 하나만으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세상은 그런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개인 투자자들은 투자비법을 배우고자 그에게 환호했고, 예능 프로와 각종 매체들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를 부르는 곳,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기꺼이 동참했고, 어느새 그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주식 재벌 복재성 대표의 럭셔리한 자택, 억대를 호가하는 고급 수입차는 연일 화제였다. 대중이 그의 화려한 이력에 주목할 때, 주간인물은 젊은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거머쥔 주식투자자라는 타이틀 이면의 ‘인간 복재성’이 궁금했다. _박정연 팀장 주식 청년 재벌, 사회에 ‘사랑의 희망’을 전하다 19세 소년 복재성 유학경비 충당 위해 300만원으로 시작한 주식 투자 “학창시절 일본어 특기생으로 대학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정되어있던 특기자 목록에서 제 이름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배후 사정을 알게 되었고, 어린 나이었지만 사회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을 떠나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었기에 유학을 가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복재성 대표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틈틈이 모아온 전재산 300만원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4년 유학경비에 소요될 학비와 생활비를 계산해보았습니다. 대략 2억 4천만원 정도의 경비가 필요했고, 당시의 제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방책은 부동산과 주식이었습니다. 부동산보다는 주식이 제가 가진 300만원으로 현실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렇게 주식투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을 향한 거창한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번 시작한 것, 제대로 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을 뿐이었다. 복재성 대표가 주식을 시작했던 당시는 주식투자에 대한 인식 자체도 부족했고, 주식을 한다고 하면 ‘집안 기둥을 뽑아먹을 녀석’이라는 둥 핀잔을 받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재성 대표는 본인의 확고한 소신을 바탕으로 주식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에서 주식투자 관련 서적을 전부 사들였고, 한권 한권 정복해나갔다. 그렇게 2개월 여. 이론을 마치고, 실전으로 돌입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수중의 300만원을 전부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로써 첫번째 난관에 부딪힌 복재성 대표. 여기서 포기하느냐, 다시금 도전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치열함’으로 이뤄낸 인고와 숙성의 시간 복재성 대표의 선택은 ‘여기서 무너져 내릴 순 없다’였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보란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직권남용 부당처우를 했던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유학자금이 필요했다. “딱 2년만 주식에 미쳐보자. 딱 2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이를 악물고 나의 모든 열정을 몽땅 쏟아내어 보자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깜깜한 터널 끝에 한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다. 해답은 찾았지만, 문제는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 복재성 대표는 낮에는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저녁에는 pc방에서, 주말에는 호프집에서 밤낮, 주일주말 가릴 것 없이 2개월 간 일에 몰두했고, 그렇게 다시 300만원을 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실을 단단하게 다졌던,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하면 안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00만원을 잃었던 당시는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에 단련되어 현재의 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제 자신이 이뤄낸 것이기에 누구든지 목표에 상응하는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재성 대표의 현재 대단해 보이는 화려한 삶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이러한 인고의, 숙성의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복재성 대표는 담담히 읊조렸다. 개인투자자들을 돕고자 힘써왔던 지난날 복재성 대표는 숙성기간을 거치며 주식투자자로서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주변에서 주식 투자에 실패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았다.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던 시절이 떠올라 안타까웠던 복재성 대표는 온라인 주식카페를 개설하여 개인투자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큰 사명감을 가졌었습니다. 그 당시는 주식투자 10번 중 9번을 실패해도 1번을 성공한다면 서민들이 단기간에 큰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도 많은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그것이 제 열정의 원동력이기도 했고요. 반면 현재는 개인투자자를 돕는다는 미명하에 제도를 수정하여 개인이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막혀버렸습니다. 이제 프로낚시꾼들만 물고기를 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닫았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이 돈을 벌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제 유명세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주식 강의. 그를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반대급부로 블랙컨슈머와 악성네티즌 또한 생겨났다. 하지만 한층 단단해진 복재성 대표는 더 이상 세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소신대로 나눔 활동을 펼쳐오고 있을 뿐이다. 기꺼이 따뜻한 손길 내미는, 기부 릴레이 대한민국을 희망하며 “10대라는 나이가 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재성 대표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 생각을 이야기 하자 복재성 대표는 말을 이었다. “10대는 未成年,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나이입니다.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이 대통령도 꿈꿔보고, 국회의원도 꿈꿔보며, 다양한 꿈을 꾸는 시기입니다. 20대는 그 꿈들을 하나씩 실천해보는 나이이고, 30대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꿈을 잡아 키워가는 나이이며, 40대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확고히 해나가는 나이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10대 아이들이 과연 어떤 꿈을 꾸는지 말입니다.” 복재성 대표가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나눔 활동을 시작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모교인 군산 중앙고 후배들 중 재능을 갖추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마음껏 꿈을 꾸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졌기에, 돈걱정 없이 마음껏 꿈을 펼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신이 받았던 것과 같이 사회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훈훈한 대한민국이 되길 희망하며. 이 밖에도 복재성 대표는 장애인 단체 후원 등 다방면으로 기부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복재성 대표는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누구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꿈꿉니다. 다만 성공한 사람이 드문 이유는, 성공을 꿈꾸지만 그에 합당한 노력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안주보다는 도전을 선택하세요.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하세요. 모두가 주식투자에 대한 편견으로 만류할 때, 저는 주식투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겁내지 마세요. 사회가 불안정하다 보니 안정을 추구하는 젊은 친구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20-30대 분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전력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날의 도전은 결과가 어떻든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모두 2017 정유년 뜻한 바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006]
    • 경제
    2017-02-01
  • 완벽주의 ‘채언니’ + 천재 MD ‘갓핸드’ = 코페르,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한 그 치열한 공생관계 속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은 피부와 직결되어 있다. 고가의 성형시술을 받고 예쁜 옷을 걸친들, 본연의 피부가 좋지 않으면 꾸며진 아름다움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의 ‘피부’에 대한 고민은 한결같다. 여기에 ‘코페르’는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All in One 제품으로 간편함은 물론 피부재생에 도움을 주는 병풀추출물을 67.8%나 아낌없이 듬뿍 넣어 제조 성분에 차별화를 가했다. 뛰어난 제품력에 소비자 참여형 SNS마케팅까지 더했더니 전제품 매진을 기록하며 국내 화장품 업계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코페르.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한 열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채언니’ 채윤석 대표와, ‘갓핸드’ 허운회 대표의 기분 좋은 아웅다웅 공생관계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_박정연 ­­팀장 제조유통 ‘Best Innovation’과 연구개발 ‘ES Biotech’의 합작으로 탄생한 코페르(Kopher), 그 힘찬 서막을 열다 2016년 8월 22일. 정직하게 ‘성분’으로 승부하는 ‘코페르’ 화장품이 런칭됐다. 좋은 제품은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본다고, 코페르는 런칭과 동시에 SNS상에서 핫한 화장품으로 입소문을 타며 1,2,3,4차 생산품 전량 매진의 쾌거를 안았다. Best Innovation과 ES바이오텍이 합작하여 레시피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제작 유통한지 2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과이다. Best Innovation은 뷰티 에스테틱을 전문으로 하는 유통 회사로 ES바이오텍에서 연구개발한 코페르의 한국총판권을 갖고 코페르 제조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화장품 브랜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코페르가 이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채윤석 대표는 3가지를 말한다. 첫째 아낌없이 쏟아넣은 좋은 성분, 둘째 SNS를 활용한 소비자 참여 마케팅, 마지막으로 완벽한 화장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채윤석 대표와 허운회 대표의 양보 없는 치열한 열정까지.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루었기에 코페르가 탄생했고,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피부재생에 도움을 주는 병풀추출물 67.8% 함유 정직한 화장품 ‘코페르(Kopher)’의 탄생 기존 화장품의 성분을 살펴보면 정제수, 즉 정제된 ‘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부를 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화장품 성분의 절반 이상이 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제수를 기본 베이스로 하여 피부에 좋은 성분을 소량 첨가하는 것이 기존 화장품의 제조 방식이었다면, 코페르는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방식을 뒤집었다. 상처재생에 뛰어난 효과를 지닌 병풀추출물을 67.8%로 함량을 대폭 늘려 기본베이스로 하고, 그 다음에 정제수를 첨가한 것이다. 이러한 제조방식의 작은 변화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낌없이 투여한 정직한 성분은 소비자의 피부에서 정직하게 효과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서브브랜드인 ‘라라봉’의 마스크팩 역시 병풀추출물이 53.4% 함유되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바싹 마르는 일반 마스크팩과는 달리 ‘고농축 수분폭발 마스크팩’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허운회 대표는 병풀추출물과 All in One 화장품의 원조인 인물로, 코페르와 라라봉의 기분좋은 성공으로 이를 비슷하게 따라 만든 제품들이 하나둘 시장에 나오는 것에 대해 '우리 제품이 그만큼 좋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후발주자들이 따라만들고 싶은 제품들을 계속적으로 개발하겠다'고 말한다. 소비자와 함께 만들어 가는 코페르 사회적 기업으로의 발돋움 채윤석 대표는 ‘채언니’로 허운회 대표는 ‘갓핸드’로 SNS상에서 불리운다. 이는 소비자들이 지어준 애칭으로, 코페르와 소비자간의 거리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Best Innovation에서 코페르의 제작·유통을 담당하며, 채윤석 대표는 별도의 제품 홍보 없이 화장품 샘플만으로 SNS마케팅을 시작했다. 소비자들과의 소통창구로 카카오스토리를 개설하여 24시간 밤낮없이 소비자의 의견을 들었다. 점차 제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후에는 보다 소비자들과 가까이 만나고자 지역간담회를 주최했다. 소비자들의 생생한 후기를 듣고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요청사항을 수렴했다. 제품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사용해보면 코페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채윤석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코페르 세럼은 물론 비누까지 전제품 매진을 기록하며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소비자들의 사랑으로 클 수 있었다’며 겸손하게 말하는 채윤석 대표. 그는 소비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사회로 환원하고자, 보이지 않는 작은 노력들을 지속해오고 있다. 지역사회의 소외계층들에게 필요물품 기부는 물론, 아산시와 협력하여 자선 바자회 개최 등 대한민국 사회에 기부문화의 확산을 촉진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코페르를 ‘낳은’ 허운회 대표, 코페르를 ‘키운’ 채윤석 대표 건강한 피부를 위한 끝없는 열정의 아웅다웅 코페르 세럼의 성공으로 다음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All in One 클렌징인 ‘코페르 비누’가 탄생했다. 코페르 세럼 사용 후 코페르 제품에 대한 완벽 신뢰를 갖게 된 소비자들은 코페르 비누 또한 애정해 마지않았다. 비누를 출시한지 한달도 채 되지않아 전체 완판의 기쁨을 안은 것이다. 소비자들이 이토록 코페르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두 대표의 한치의 양보없는 열정이 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두 대표는 코페르 비누에 얽힌 에피소드를 꺼내놓았다. 허운회 대표가 1차로 비누를 개발하여 채윤석 대표에게 샘플비누를 건넸다. 채윤석 대표는 직원들과 꼼꼼하게 피부, 헤어 클렌징을 해본 후 제안사항을 허운회 대표에게 요청했다. 직원 9명에게 합격점을 얻었지만, 1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면, 비누는 다시금 연구개발 단계로 들어간다. 허운회 대표는 ‘10명 모두에게 적합할 수는 없다. 나를 믿으라’고 이야기하면, 채윤석 대표는 ‘완벽한 제품을 위해 10명 모두에게 합격점을 얻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2차 비누가 왔고 3, 4차 비누가 왔다. 총 7번의 업그레이드 끝에 명품 비누인 ‘코페르 비누’가 탄생했다. 코페르의 화장품은 ‘세럼’과 ‘비누’ 이 2가지가 전 제품으로, 제품가짓수를 늘리기보다는 한가지를 제대로 만들어 양질의 제품을 만들자는 두 대표의 철학이 맞닿은 지점이다. 하나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선보이기까지, 완벽한 제품을 선보이려는 끊임없는 의견다툼으로 매일같이 아웅다웅 옥신각신한다는 두 대표. 비누를 제작 개발하는데 무려 7번의 개발단계를 거치며 다투고 화해하며 마신 술값만 해도 꽤 많을 것이라며 마주보며 웃는 두 대표를 보니 기자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그들의 완벽을 향한 열정이 값지다. "좋은 원료를 찾기위해 다양한 재료를 즙도 내보고, 발효도 하며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코페르의 차기작으로 선보이고자 저희가 주목한 원료는 000입니다. 물론 000은 일급비밀입니다.(웃음)" 두 대표와의 인터뷰, 웃음이 끊이질 않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주간인물은 채언니와 갓핸드의 흥미로운 공생관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여성들의 피부 아름다움을 책임져주길 기대한다. [1005]
    • 경제
    2017-01-13
  • 무역 경력 40여년 FTA 23년, 독보적인 FTA의 실무 전문가 “세계는 현재 FTA 네트워크 전쟁 중입니다”
    FTA는 국가 간 맺는 특혜 무역협정의 하나로 관세의 인하·철폐, 서비스 개방, 무역제재 수단의 최소화, 시장 통합 등 국제시장에서 자유무역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한다. FTA 협정으로 양국의 경제가 효율적으로 성장하기에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FTA별, 국가별 규범을 알지 못하면 크나큰 손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40여 년 간 무역 실무 경험을 쌓아온 이창우 회장은, 무역 현장에서 FTA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FTA에 대한 연구와 강의, 컨설팅, 수출촉진 활동을 꾸준히 해온 FTA의 독보적인 실무 전문가 1호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FTA산업협회(KFIA)를 설립하여 국제 통상 분야에서 국가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이창우 회장. 그를 만나 FTA의 중요성과 메가 FTA로의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박정연 ­­팀장 “FTA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국내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규모는 실로 대단하다. GDP(국내총생산) 90% 이상, GNI(국민총소득) 100% 이상으로, 체감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곡물의 70% 이상을 수입하고 있으며 약 97% 에너지와 98%의 자원 또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창우 회장은 우리나라는 무역의존도가 특히 높은 국가이기에, 국가 경제가 걸린 중대한 문제인 FTA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언급했다. FTA는 점점 더 방대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올 6월까지 발효된 FTA는 424개로, 협상이 진행 중인 것까지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약 700개가 넘을 것이라고 이창우 회장은 말한다. FTA는 이미 세계 무역의 절반을 넘어섰고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기존의 무역은 WTO 등에서 정한 ‘무역 표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따르면 됐다. 반면 FTA는 협정별로 규범이 전부 다르고, FTA 교역 프로세스 또한 다르기 때문에 같은 품목이라도 FTA에 따라 거래 프로세스가 달라 상당히 복잡하다. 이로 인해 국내 기업이 FTA 협약을 맺은 국가로 수출을 하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례로, 한 국내기업이 라면 13톤을 터키에 수출하려다 무역절차 중 ‘진입규범’에 문제가 생겨 전량 폐기, 막대한 손실을 떠안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무역 절차 중 ‘원산지 증명’에만 신경 쓴 나머지 앞선 절차인 ‘진입규범’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업의 손실은 결국 국가적 손실이다. 이러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이창우 회장은 실무경험과 끊임없는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6개 정부부처와 35개의 대학, 9개 공무원 연수원, 지자체, 경제단체, 로펌, 국내 대기업 등에서 FTA 강의를 해왔다. 그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욱 유명세를 띤다. 인도, 중국, 헝가리, 독일, 일본, 베트남 등 각국에서 그에게 FTA 협조를 요청했고, 특히 중국은 FTA 전문가인 그를 영입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독일, 헝가리, 중국기업들에게 FTA 강의를 했으며 중국기업들에게는 현재도 FTA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외로 진출하지 않고, KFIA를 설립하여 국내에서 활동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FTA를 하려면 4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국익을 창출해야 기업이 살고 국민의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둘째, 시장경쟁력의 강화입니다. 세계는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제통상 시장의 트렌드에 맞춰 국내 시장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셋째 미래먹거리 창출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에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먹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넷째 일자리 창출입니다. FTA는 일자리 창출의 보고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국에서 저를 초빙하려는 이유가 FTA를 활용하여 수출을 증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일자리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FTA 특성에 부합하는 수백 개의 FTA 콘텐츠와 아이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에는 없는 FTA 지식재산이기 때문에, 제가 중국 등 해외로 나가면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지만 우리 기업들은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 저의 지식과 경험, 콘텐츠를 활용하고 싶지, 아무리 큰돈을 번다하더라도 해외에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대사나 공사, 국장급들이 저를 찾아오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관심이 없어서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창우 회장은 국제적으로 FTA 활용분야의 독보적 존재이기에, 그가 해외로 나간다면 기술유출을 넘어 지식재산 유출이 발생함으로써 더욱 광범위하고 막대한 국가적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TPP, RCEP 등 메가 FTA에 대비해야 합니다” ‘메가 FTA는 두 나라 간 협정인 양자 FTA와 달리,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 간 FTA’ 중에서 매우 큰 다자 FTA를 뜻한다. 한·중·일 FTA, 아시아 태평양 경제통합 FTA(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이 이에 포함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시장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TPP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이창우 회장은 강조한다. 예를 들면 “TPP에 가입하지 않은 채로 TPP 국가로 수출하고자 하면 12나라로 각 12번의 통관절차가 필요합니다. 반면 TPP 가입을 하면 교역 규범이 통일되고, 인 허가와 같은 진입조건이 같아지기에 시장 통합효과를 냅니다. 물류부터 구매, 마케팅, 생산 등 나라별로 수출 설계를 해야 했던 것이, 12나라를 한 시장으로 간주함으로써 교역비용과 시간, 노력 등이 1/12로 절감이 가능한 것이지요. 물론 국가별 예외는 있습니다만 수출의 편리성 제고는 물론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미국 트럼프 신 행정부가 TPP를 탈퇴한다고 주장했으니 결과를 두고 봐야 합니다.” FTA 체결도 중요하지만, 체결한 FTA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창우 회장은 ▲FTA 체결국과는 FTA를 통해 거래할 것 ▲FTA 협정문을 준수할 것 ▲FTA 체결국의 현장 팩트를 반영할 것 ▲FTA 진화를 따라갈 것을 강조했다. 이창우 회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메가 FTA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民官學이 협력하여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야 함을 역설했다. ‘FTA는 일자리 창출의 황금 시장’임을 이야기하며 언제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콘텐츠, 아이템, 노하우, 비즈니스 모델들을 정부, 지자체, 기업체 등과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주간인물은 이창우 회장이 FTA 전도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걸어온 지난날의 노고에 존경을 표하며, 그가 있어 국제 통상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를. 그리하여 국가 경제가 생명력을 얻어 보다 활기찬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대한다. <現 국내 Profile> 現 한국FTA 산업협회 회장 現 World FTA Forum 회장 現 한국통상정보학회 부회장 現 한국서비스산업총연합회 FTA 전략위원장 現 고려대, 중앙대, 세종대, 경기대 등 35개 대학 FTA 외래교수 現 9개 공무원연수원 FTA 외래강사 <외국 FTA 경력사항> 주한중국상공회의소 및 주한중국상무부투자촉진국 임직원 FTA 강의 헝가리 국무총리 방한 수행 기업 FTA 강의 독일 강소기업 방한단 FTA 강의 주한 인도대사 FTA 활용 협의 주한 태국공사 FTA 활용 협의 일본 경제산업성 국장급 대표단 FTA 협조 협의 중국 상무부 요청으로 중국내 기업 및 공무원 FTA 강의 주한 러시아 연방정부 무역대표부와 공동으로 민간 측면에서 한-EAEU FTA 추진 협의 인도네시아 정부 청년 일자리 창출 사업 참여 코스타리카 대통령 방한단 FTA 협조 협의 중국, 러시아, 태국 등과 FTA 교재 출판(FTANOMICS: 이창우 저) 추진 외 다수 [1004]
    • 경제
    2017-01-06
  • 함께 해 온 세월, 깊은 사연이 담긴 가구 “가구 수리는 추억의 재현입니다”
    뚝딱뚝딱. 스윽스윽. 정겨운 작업소리를 들으며 양호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문을 관통하여 작업실에 내리쬐는 12월의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는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마주한 오양호 장인. 안경 너머 보이는 반달눈, 사람 좋은 웃음이 서린 입가. 흡사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가 연상되는 푸근한 인상이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말썽꾸러기 목각 인형 ‘피노키오’를 사랑으로 포용해주었듯, 오양호 장인은 섬세한 손길로 오래되어 낡고 망가진 ‘가구’들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는 ‘가구는 추억’이라고 말한다. 조립식 가구를 떠올리는 기자와 오양호 장인이 생각하는 가구의 의미,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닐까. 오양호 장인이 말하는 ‘가구’를 들어보았다. _박정연 ­­팀장 ‘추억’을 선사하는 행복한 가구수리 전문점 오양호 장인을 찾는 고객들은 전부 입소문을 타고 소개로 그를 찾는다. 서울은 물론 경기, 제주 등 각지에서 새로운 탄생을 고대하는 고가구와 골동품 등이 그에게 날아든다. 다른 가구수리업체에 한번 맡겨졌던 가구가 오양호 장인에게 다시 오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낡고 망가진 가구가 100% 복원되기 때문에. 처음 가구를 들였던 그때의 모습을 되찾아주어, 처음 가구를 들이던 그날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초창기에 아주 오래된 자개장 복원을 의뢰 받았습니다. 거의 폐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오래되고 낡은 자개장이었기에 ‘너무 낡았으니 버리고 새로 하나 구입하십시오’라고 말했더니 어르신께서 저를 야단치셨습니다. ‘내가 이 자개장을 결혼할 때 혼수로 해와서 50-60 평생을 함께 해왔다. 집안도 한평생 화목했고, 자식들도 잘되어 품을 떠났다. 이렇게 福장인데 버리라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복원을 해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소개도 많이 해주시고 칭찬일색이셨습니다. 그럴 때 참 기쁘고,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고객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겨있는 가구는 ‘추억의 매개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오양호 장인은 자개장 이후 하나하나의 가구 의뢰건에 대해 더욱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여 현재 가구수리 분야에서 알아주는 오양호 장인을 이루었다. 100% 완벽하게 가구 복원 철저한 ‘장인정신’의 실현 가구 수리는 보통 자개장, 락카, 티크, 골동품 등 전문 기술 분야가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가구 수리 장인은 1~2가지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오양호 장인은 가구 수리에 관한 한 전범위를 아우른다. 어떤 가구라도 양호방에 오면 100% 완벽하게 복원 가능하다. “벌써 몇 십 년 전 일입니다만…. 부모님께서 사용하시던 고가구 몇 점이 있었습니다. 가구수리 견습생 시절, 배우는 단계이다 보니 실습을 하다 잠깐의 실수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그 때 보낸 가구에 대한 안타까움이 섞여 아쉬움만 점점 커져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구라도, 아무리 진귀한 골동품이라도 제게는 그때 그 가구만큼 소중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사용하셨던 손때 묻은 고가구를 좀 더 신중하게 다루지 못했던 그때의 실수가 제 평생의 한으로 남습니다.” 오양호 장인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슬쩍 훔쳤다. 그러한 아픈 기억이 있기에, 자신에게 맡겨지는 가구들에 더욱 완벽을 가해 복원하는 것이 아닐까. 오양호 장인은 40년간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고객들의 가구수리[추억의 재현]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후임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구 수리 기술은 빠르게 습득되지 않습니다. 가구마다 사례가 다양하기에 몇 년간의 견습 시기를 견뎌야 하는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힘든만큼 보람도 큰 작업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오양호 장인은 말을 덧붙였다. “원목가구 같은 경우, 가정에서 사용하다 보면 나무가 많이 건조됩니다. 그로 인해 의자가 흔들리고, 책상이 터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원목가구들은 재수리를 한번 받으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몰라 좋은 가구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습니다. 여름철엔 습도로 인해 늘어나고, 겨울이 되면 줄어드는 것이 원목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함께 해온 고가구 버리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해드리겠습니다.” [1004]
    • 문화
    2017-01-06
  • “웃음을 선물해 드립니다. 행복은 덤입니다”-인간비타민, 이벤트 전문MC 서교철 대표와의 만남
    편리해지는 만큼 잊혀져 가는 것도 많은 세상. 디지털의 발달로 개인화 성향이 짙어지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놀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이들은 손안의 조그맣고 네모난 세상에서 벗어나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통해 얼굴을 마주보고 웃음지으며 몸을 맞닿고 함께 하는 놀이를 경험한다. 팀워크를 도모하면서 자연스레 이해심과 협동심을 습득하게 되며, 인간관계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는 비단 어린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야유회, 워크숍, 송년회를 통해 성인들에게도 해당된다. 더불어 그는 어르신들의 놀이문화를 위해 ‘실버 레크리에이션’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아이부터 청소년, 성인, 어르신까지. 건강하고 즐거운 놀이문화의 확립을 통해 그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소통과 이해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았다. _박정연 팀장 유아동 행사부터 학교행사, 기업행사까지 행사계의 유재석으로 불리는 서교철 대표 놀이사랑 (http://playlove.or.kr),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http;//fctour.kr) ‘놀이사랑’은 서울 YMCA 건전놀이문화연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서교철 대표가 ‘건전한 놀이문화’의 정착을 목적으로 2001년 설립한 이벤트 전문 회사로, 유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성인, 실버 세대까지 전 연령을 아울러 각종 이벤트 행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유아 행사는 재롱잔치(학예발표회) 진행, 유아가족체육대회 △어린이 행사는 방과후수업(레크매직), 어린이방문 공연(노태형실장님과 함께하는 해피아저씨와 멋쟁이마술사, 튼튼아저씨 이석우님과 함께하는 튼튼아저씨와 해피아저씨 등), 웅진플레이도시 산타행사 등 △청소년 행사는 중,고등학교 축제는 물론 롯데월드 학교진로체험 레크리에이션, 웅진플레이도시 청소년힐링콘서트 △대학생 행사는 각종 대학축제, OT 및 MT 레크리에이션 △성인행사는 각종 기업체와 동우회, 동문회 등과 체육대회, 세미나, 송년회 행사 등을 진행한다. 서교철 대표에게 롯데월드와 웅진플레이도시, 리솜스파캐슬 전속 이벤트 MC로서 활동하는 내역에 대해 물었다. “롯데월드는 17년째 행사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단체로 오는 팀들을 가든스테이지에서 장기자랑을 포함하여 단체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웅진플레이도시에서는 겨울철 스노우파크 산타축제 및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위해 투입되었다가 봄,가을 진로체험 진행을 맡게 되었고 여름 워터파크 이벤트행사 진행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진로체험은 배우 김은희님과 함께 청소년들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는 힐링콘서트를 메인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효과가 좋아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리솜스파캐슬은 네잎크로바컴퍼니에서 메인MC와 더불어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상무이사직을 겸하고 있어서, 리솜스파캐슬 전속대행사로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종 행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시시각각 만능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했던 서교철 대표.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밝게 웃으며 ‘오늘은 이벤트 MC, 내일은 마술사, 내일모레는 율동선생님이 된다. 지루할 틈이 없이 매일매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낍니다” 천성이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서교철 대표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이벤트 MC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같이 ‘교철이 네가?’ 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말수도 적었고, 수업시간에 국어책을 읽는 것까지도 부끄러워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학생 시절. 모태신앙인이라 다니던 교회에서 총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마이크로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전부 제게 집중을 했고, 간혹 용기를 내어 웃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하나둘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놀랍기도 했고, 신세계였습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는 것이 굉장히 기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 총무임원시절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 마이크를 잡은 지 어언 23년이 되었네요(웃음).” 더불어 서교철 대표는 말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하다고 합니다. 조금 더 웃고자 노력한다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저의 직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아부터 어르신들까지, 연령을 불문하고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제 일이 정말 좋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23년의 이벤트MC 경력보다도, 자신의 일을 진정 즐길 줄 아는 승자이기에 이벤트MC분야에서 명MC로서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벤트 MC에게는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중요합니다” 이벤트 행사 MC로서 활동해온 23년 목표는 50주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고난 MC였던 것은 아니었다. 행사장에서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행사 진행 중 무대로 취객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땐 당황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저희 고문님이 기분이 좋으셔서 한잔 걸치셨나 봅니다. 고문님! 행사 마치고 봬요!’라고 웃으며 넘어갑니다. 취객 난입으로 많은 분들이 걱정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제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어감으로써 사람들도 함께 웃으며 넘어갑니다. 어느 날은 행사 진행 중, 갑자기 정전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력부족으로 차단기가 내려가서 불도 꺼지고 마이크도 꺼진 상태였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제가 목청이 좋다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내려두고 저의 큰 목소리로 행사를 즐겁게 이어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숱한 돌발상황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훌륭한 대처능력들이 쌓여 현재의 명MC 서교철 대표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행사가 끝나면 항상 현장 스탭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본인이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듣고, 다음 행사에 수정하여 적용함으로써 좀 더 완벽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있어 완벽을 추구하는 서교철 대표, 진정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자주 들었던 말은 ‘감사하다’ 였다. 기자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가. 팍팍한 삶에 치여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감사하다는 생각은 얼마나 잊어버리기 쉽던가.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서교철 대표의 밝은 에너지에 동화되어 있었다. 인간비타민, 웃음과 긍정을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서교철 대표가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서교철 대표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주간인물 독자분들께 인사의 말씀 전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로 즐겁게 일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또한 비수기에도 끊임없이 저를 찾아주시고 행사가 들어오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주간인물 독자분들도 자신의 직업에서 즐거움을 찾고 매일매일 감사하며 항상 웃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이 저물고 2017 정유년입니다. 뜻하는 바 이루시는 2017년 만들어가시길 바라며, 행사진행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세요. 저와 함께하는 행사! 생애 최고의 멋진 날로 만들어드릴게요.” 성균관대학교 과학기술대학원 스포츠산업학과 졸업 놀이사랑 레크리에이션 이벤트 대표 웅진플레이도시 이벤트 MC 롯데월드 이벤트 MC 네잎크로바컴퍼니 메인 MC (주) 네잎크로바관광여행사 상무이사 前 서원대학교 임상건강운동학과 출강 前 을지대학교 레크리에이션 지도과목 출강 前 무대의상 예쁘제, 파티파티, 연출 율동강사 [1004]
    • 라이프
    20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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