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08(월)
 



누구나 자신을 감싸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라는 첫 울타리를 거쳐, 연인, 새로운 가족, 또는 종교로 자신의 울타리를 옮겨간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변하지 않는 울타리, 즉 ‘진정한 사랑’의 울타리가 있다. 영성가 에크하르트 툴레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사랑은 오직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될 때만 경험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며, 이곳이 삶과 예술,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이 존재하는 곳이다.”
위대한 철학가들과 예술가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가들이 삶과 하나가 되어 경험했던 진정한 사랑이 머무는 곳은 어떤 곳일까? 추산동에서 그곳에 머물고 있던 거인(巨人)을 만나고 왔다.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평온했으며 아름다웠다. 대담 시간 동안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_문다정 기자


“심산 노수현 선생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을 드셔서 손이 떨려도 그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으면 절대 떨지 않으셨어요.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는 개자원화보를 배웠습니다. 전통과 기술의 습득을 위해 열심히 했어요. ‘묵화를 통한 창작 의지의 계발’이란 주제로 논문도 썼어요. 국회도서관 우수논문으로도 선정되었죠.” 서울대 학사 이후 동 대학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중, 고등학교 교사와 작가 생활을 병행했다. “75년 30살 때부터는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 때부터 실험을 많이 했어요. 화선지에 스며드는 담채화가 아니라 화선지에다가 바로 아크릴을 썼어요. 이런 실험을 한지 44년이나 됐어요. 전통을 배웠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전통 습득을 먼저 해야 한다. 체득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우리 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영감의 자유, 기술의 자유, 전통의 존중.”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시인은 그렇게 님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경계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그와 헤어지고 혼자 살려고 버둥거렸다. 고작 그림 그리는 것밖에 더 있나. 1978

첫 남편과 사별 이후, 78년 돌연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프랑스에서 문신을 만난다. 그리고 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나는 예술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작품이 곧 그 사람이잖아? 다시 태어나도 그 사람 꼭 만날 거야. 문 선생님은 6·25 때부터 돌 깨서 고향에 자기 미술관 짓는 것이 꿈이었대. 그럼 내가 뭐 별수 있나요. 소원 이뤄줘야지. 문 선생님 일도 하며 내 작업도 했어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후회 없어요.” 서로를 알아본 최성숙과 문신은 80년에 귀국하여 15년 세월에 걸쳐서 직접 미술관 건립하여 1994년 문신미술관이 개관하게 된다. 하지만 개관 1년 뒤 문신은 타계한다. 그 후 모든 것을 그녀가 이어받는다.”문신 때문에 작가 활동 못 해서 좀 그렇지 않으냐고 하면 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문신은 문신이고 나는 나예요. 모든 결정은 내가 한 것입니다. 문 선생님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좋은 그림 못 그렸을 거예요."


최성숙의 작품은 순수하며 자유롭다. 묵향이 나면서도 모던함이 느껴진다. “당연한 거예요. 당나라 시대에는 당나라 그림이 나와야 하는 것처럼, 내가 현대 시대에 사니깐 이런 그림이 나와요. 하지만 법 없이 그리면 안 돼요.” 그녀는 작가는 기술을 완벽히 습득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렇게 될 때만 표현의 자유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표현의 다양화보다는 재료의 다양화만이 보이고 표현은 빈약해져 간다. “사고의 빈약과 욕심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그릴지만 생각해서 그래요. 욕심낼 필요가 없어요. 그림은 자기 본성이 나오는 거예요. 욕심만 사라지면 자기가 가진 것이 그대로 나와요. 본성이 드러날 때, 개성이 나옵니다. 똑같은 걸 그려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오니 얼마나 좋나요?” 석도는 그림은 내 마음이 수고롭지 않을 때 비로소 그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녀의 그림이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건 그녀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 풍부한 그림 그리는 여자가 복잡한 외부의 일들을 하면서도 자신의 본성을 지킨 점이 신기하다. “그런 것들에 흔들리면 안돼요. 핑계대면 안돼요. 문 선생님께 작가로서 집중하는 법을 배웠어요.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남을 때마다 그림을 그렸어요. 안되는 게 없어요. 나도 사람이라서 스트레스는 받지만, 그걸 그림에 몰두해서 풀어요. 그게 내 정신적, 육체적, 건강 유지 비법입니다.” 향년 74세의 그녀는 정정하다. 하지만 몇 해 전 구강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항암, 방사선 치료는 받지도 않았지만 어느 날 검사해보니 깨끗하게 나았다고. 하나님이 이 정도로만 혼을 내신 거 같다며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87년도에 영세를 받은 그녀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잘해서 이룬 게 아니에요. 기적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거지. 미술관은 정말 기적의 힘으로 지어진 집이야. 재벌로부터 후원받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떳떳하게 국가에 기증할 수 있는 겁니다.”



문신 미술관은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공공의 것이라는 문신의 뜻에 따라 2003년 창원시에 기증되었다.

“우리가 세상에 떠날 때 입고 있는 옷 한 벌도 가져 갈 수 없어요. 다 내려놓고 가야지. 국가에 맡기면 보존이 될 수 있어요. 저작권도 풀어 작가들에게 활용 할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6월 달엔 문신예술아트상품 참여제안 전을 열 예정입니다.” 그녀는 작은 미니어쳐를 보여준다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작가들이 500개 한정으로 문신 작품을 작게 만든 것이다. 밑에는 작가들의 이름도 적혀있다. 제작비가 많이 나가지만 작가들에게 최대한 많이 돌려준다고 한다. 자신이 돌려받는 부분 없이 아트상품을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만드는 건 오롯이 문신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문신의 저작권을 활용하기 원하는 작가들을 참여시켜 전시를 열고 추후 각자 개인의 사업으로 발전시켜, 창원시가 추구하는 문화예술사업과 경제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2022년은 문신 탄생 100주년이다. 100주년을 맞이 해 창원시는 올해부터 문신미술관과 함께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문신미술관을 창원의 브랜드로 만들어 문신의 예술성과 작품성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남들보단 조금 늦었지만, 요즘은 100세 시대잖아요? 지금까지 50% 했는데 앞으로 남은 50%를 어떻게 채워나갈까 하는 희망에 살아갑니다. 우주를 유영하듯 내 그림 어디 있는지 잡으러 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두근거려요. 이 기분에 살아갑니다.”

영감과 기술의 자유를 넘어서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그녀는 편안해 보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시적인 것들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이 우리의 삶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욕심 없이 예술을 사랑한 그녀의 행보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 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무는 그녀는 장자의 하늘을 나는 ‘대붕’을 떠올리게 한다. 메추라기의 조롱을 무시하고 하늘을 날기 위해선 구만리 높이까지 날아올라야만 바람을 아래에 둘 수 있다고 한다.
그 도약까진 말하지 못할 아픔도 많았을 터. 하지만 이젠 하늘을 날며 땅의 소음이 들리지 않으니 그녀는 자유롭다. 대담이 끝난 후 문신 미술관을 한 바퀴 돈다. 마침 문신 건축 드로잉 전을 하고 있다. 미술관 건립 이전, 문신이 연필로 그린 미술관의 전경이 소박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 꿈들의 여정이 작은 종이에서 시작되기 위해선 누군가가 문신의 큰 울타리가 되어줬기 때문인 걸 안다. 이 꿈들은 이제 실제가 되었고, 개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1946 한국 부평 생
•1964 경기여자 고등학교 졸업
•1968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72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과 졸업
•1978 서독 괴팅겐 대학 수학
•1979-80 프랑스 아카데미 그랑쇼미엘 수학

주요경력
•문교부 시청각 교재 검열위원(1973)
•개천예술제 심사위원(1984-85)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 이사(2009)
•파리 시떼 데자르 입주 작가 선정(2010)
•박물관·미술관 발전 유공자 정부 포상, 국무총리 표창 수상(2010)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공헌 예술가 선정(2018)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 객원교수(1999-)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2004-)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관장(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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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감싸 안은 큰 울타리 - 최성숙 화백 /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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