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08(월)
 



현재 한국 무용사에서 전통 춤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던 무용가들의 창작활동이 주춤한 가운데 대신 전통 춤에 몰입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전통 무용춤이 부상, 활성화를 위하여 묵묵히 평생 외길을 걸어온 모녀가 있다. ‘모녀전승’은 올바른 전승의 의미를 두고 시작한 전통 춤 공연으로 독자적인 매력의 춤사위를 선사하는 한순서 명인과 그의 딸 이주희 교수를 만나 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_우호경 차장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춤을 추고 있었다”


한순서 명인의 아래서 자란 이 교수.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춤을 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성장하여 어린 나이에도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어머니가 춤을 추는 모습을 늘 지켜보곤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 교수의 어머니인 한순서 명인은 평양 출생이며, 77세 나이다.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잘 알려진 강태홍 선생으로 부터 피난지인 부산에서 춤과 음악을 처음으로 사사 받고 17세에 자신의 이름을 건 ‘한순서 전통춤연구소’를 부산에서 열어 이듬해 개인발표회를 하는 천재 무용가로 알려졌다.
이 교수는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춤을 추고는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매일매일 반드시 춤 레슨을 받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단체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대학을 가서는 가야금 전공을 했다. 그가 음대에 진학한 가장 큰 이유는 춤을 추는 사람은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음대를 가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자료’인 어머니의 춤을 수십 년 째 전승,
발전시켜오는 가교 역할을 하다



이 교수는 현재 중앙대학교에서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 무용전공 학생들을 18년째 가르치며 늘 진심으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는 교육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전통문화를 새롭게 전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고 전했다. 그가 2002년 모녀 전승 타이틀로 공연을 정한 이유는 전승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이 교수는 어머니와 같은 무대에 12번이나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으며, 그 공연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무대는 첫 번째 국립국악원에 모녀전승이라는 타이틀에 함께 섰던 기억이 가장 남는다며 전했다. 이는 모녀가 함께 춤을 추었으며 어머니가 춤을 추면 내가 받아 추고, 내가 춤을 추면 어머니가 춤을 추는 방식으로 공연을 마쳤다.

당시 이 교수는 절대 어머니의 춤을 능가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후회의 감정이 스쳤다며 전했다. 일본 유학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는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수십 년 춤을 추어 온 어머니의 농익은 춤의 표현을 어찌 감히 따라할 수 있느냐고,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절대로 어머니의 춤의 세계는 쫓아갈 수 없다는 말에 이 교수는 그 말에 공감하여 그 이후부터 어머니하고는 같은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는 똑같은 춤을 추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 이 교수는 다양한 춤 세계 중 ‘상장고’라는 춤에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상장고란 이 교수가 붙인 ‘설장고’의 다른 이름으로, 판 굿에서 장구 연주자가 혼자 나와 멋진 발놀림(몸동작)과 화려한 장구 가락을 보이는 놀이를 가리킨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살풀이, 승무, 오고무 역시 그 매력 속에 푹 빠져있다.
“춤은 내 인생에서 엄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엄마에게는 응석도 부리고 때론 떼를 쓰고 하는 편안함도 있고, 떨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내 몸의 일부입니다. 수십 년을 무대 위에 섰는데도 아직도 공연 시작 전에 떨립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 조명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긴장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몸에 신이 오신 것처럼 장단을 치고 북을 치면서 무대를 즐기는 이 교수. 춤의 기본적인 골격은 있지만 이 교수의 신명 나는 춤과 장단은 매번 관객 반응에 따라 시간과 길이 역시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작은 거인 같은 열정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한국에 문화 예술가들은 무대에서만 빛이 나던가, 아니면 학자로 서만 인정을 받던가 하는 사회구조적인 것이 때론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무대에 서야하기 때문에 정체성이 흔들릴 때로 있었죠. 직업인으로 살아야 하니 좀 더 좋은 테크닉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몰입하지 못하고 학자로서 논문도 써야 하지만, 예술가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두 가지 역할의 무게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의 장기계획은 나만의 고유의 ‘이주희 스타일’로 다시 만드는 것과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춤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주간인물은 그의 열정과 에너지, 이 교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그녀만의 신명 나는 춤사위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길 확신하며, 그의 예술 인생을 주목해본다. 

이주희 주요연혁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무용전공 교수

한순서 주요연혁
•한순서 춤연구소 대표
•평남무형문화재 4호 평남수건춤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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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인물(weeklypeople)-우호경 차장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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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 무용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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