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8(수)
 



2020년 경남지방중소벤처기업청이 선정한 백년소공인에 소산(小山) 배창진 대표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선친인 종산(宗山) 배종태 선생의 뒤를 이어 물레성형, 장작가마 등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투철한 장인정신과 숙련기술로 백년소공인으로서 성장역량을 인정받은 배창진 작가. 그를 만나기 위해 분청사기의 본고장, 경남 김해시 진례면으로 향했다. _정효빈 기자

“선친께서 살아계실 땐 늘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가마에 불을 지피자마자 눈이 오기 시작했어요. 허리까지 쌓일 정도의 폭설이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새도록 불을 땠지요. 기압이 낮아 불 온도가 잘 유지되지 않았는지 가마를 열어보니 50점의 도자기 중 단 한 점만이 살아남아있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자기 한 점을 꺼냈는데, 힘 력(力)자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새겨져있더라고요. 마치 신께서 ‘오늘 고생 많았다’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긴 노고 끝에 나오는 이런 작품 한 점을 통해 자연의 경이로움과 엄청난 희열감을 느끼곤 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최초의 기억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흙과 불을 다루던 아버지의 모습은 늘 그와 함께였다. 전통 장작가마 기능보유자였던 종산(宗山) 배종태 선생의 아들로 자라온 배창진 작가에겐 도예가의 길이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김해시 진례면에서 선친의 뒤를 이어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 작가. 도예가로서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그저 뒤따라가지만은 않겠다는 것이 큰 숙제이자 임무다.


“아버지께서 작업하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작품도 닮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저로서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을 빚어내고 싶은 욕심이 크죠. 김해를 대표하는 분청사기와 진사를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합니다. 가마에 불을 때는 날엔 많은 분들이 직접 작품을 보실 수 있도록 공방에서 품평회를 여는데요. 좋은 작품에 대한 판단기준을 세워드리기 위해 전체 제작과정을 설명해드리기도 하고, 가마 앞에 모여 어떤 조건에서 이러한 작품이 나왔는지, 왜 실패했는지 등 의견도 다양하게 나눕니다. 이 시간을 함께한 분들께선 작품도 더 귀하게 여겨주시고 도공의 노고를 더욱 깊게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 저 역시 참으로 애정하는 시간입니다.”

흙과 불, 도공의 혼이 빚어낸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인 15~16세기에 번성했던 생활자기의 하나로, 가장 한국적인 미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투박하지만 형태와 문양이 자유롭고 박진감 넘쳐 서민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도자기로 알려진 분청사기. 그중 도자기 유약에 구리를 환원 소성해 만든 진사도자기는 제작 난도가 높아 숙련된 도공들도 쉬이 도전하지 못하는 분야다.

“진사도자기는 도공이 직접 문양을 새기거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마 속의 불이 독특한 빛과 문양을 만들어냅니다. 도공의 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지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 나머지는 자연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가마에서 모두 깨져버린 도자기를 보고 있노라면 불의 힘 앞에서 비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성할 때의 날씨와 주변 환경, 가마의 수분 함유량, 나무의 상태, 도공의 컨디션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문양이 탄생하기에 그 가치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배창진 작가는 손수 물레를 사용해 도자기를 성형하고, 전통 장작가마를 사용해 도자기를 구워낸다. 고된 작업이지만 전통방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형과 색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량 생산하는 작은 생활자기까지, 모든 작품의 시작과 끝이 그의 수작업으로 탄생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 그릇으로 내 몸에 들어갈 음식을 먹는 일”이라며 “시간은 오래 걸릴지라도 모든 작품을 수작업으로 완성한다는 자부심이 크다”라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배 작가가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해시 진례면은 수많은 도예가들이 불과 흙을 다루며 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수많은 도공들이 작품활동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얻는 영감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배창진 작가는 그 역시 “가을이 되면 넓은 들판에 노란 밀알이 익어가던 멋진 동네가 점점 공장으로 둘러싸이고 있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예술가의 머릿속엔 늘 풍부한 감성이 피어올라야 하는데, 삭막해지는 주변 환경을 보며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도자기를 만들며 발생하는 연기나 소음 때문에 외진 곳에서 작업을 하는데도 각종 민원으로 화살이 향할 때면 도공들이 떳떳하게 설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도 많고요. 또한 돼지열병과 코로나19 확산으로 2년째 김해도자기축제가 개최되지 못하고 있어 아쉽습니다. 도자기축제는 대중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작품을 연구하고 작가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도 해주거든요. 제가 55세가 되는 해에 첫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갖고 있는데, 얼른 힘든 시기를 극복해 대중들과 다시 만나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나무. 불을 지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나무처럼 자신의 모든 혼을 쏟아 좋은 작품을 완성시키고 싶다며 밝게 웃는 배창진 작가. 그의 굳건한 다짐과 발걸음을 주간인물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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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인물(weeklypeople)-정효빈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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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불, 도공의 손길에 담긴 백년의 꿈 - 배창진 2대토광도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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